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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김문기에 진실

엔사이드 기자 블로그 2017. 4. 3. 21:07
시대 조선
출생1399년(정종 1)
사망1456년(세조 2)
경력 예문관검열, 병조참의, 형조참판
유형 인물
직업 문신
성별
분야 역사/조선시대사

초명은 김효기(金孝起).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충청북도 옥천 출신.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당대에는 본관을 김해(金海)로 사용하였으나, 후대에 이르러 그 후손들이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손인 김해김씨와 구별하기 위하여 김녕(金寧)과 경주(慶州)로 사용하는 두 파로 갈려졌다. 아버지는 김관(金觀)이다.

1426년(세종 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해 3년 동안 시묘하였다. 1430년 예문관검열, 1436년 사간원좌헌납을 거쳐, 1445년에 함길도도절제사인 박종우(朴從愚)의 천거로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1447년에 이질로 군무에 장기간 복무할 수 없게되자 내직으로 들어와 1448년에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에 임명되었다.

1450년 병조참의를 거쳐, 1451년(문종 1) 함길도도관찰사에 임명되자 임지에 가서 안변·정평 등지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1453년(단종 1)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외직인 함길도도절제사로 나갔다.

1455년세조가 즉위하자 차사원(差使員)과 힘을 합쳐 유시에 따라 온성의 읍성을 축조하는 공사에 공을 세웠다. 그 해 또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다음 해인 1456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한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주살당할 때, 김문기도 이 사건에 관련되어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단종 복위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 6인의 절의(節義)를 ‘사육신’이라 했으며, 사육신의 사실은 남효온(南孝溫)이 쓴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 실려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 뒤 1691년(숙종 17) 국가에서는 육신을 공인해 복관시켰고, 뒤따라 1731년(영조 7)에는 김문기를 복관하고 1757년에 충의(忠毅)란 시호를 내렸다.

또한 1791년(정조 15)에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 김문기는 삼중신(三重臣: 민신(閔伸)·조극관(趙克寬)·김문기)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고, 성삼문·박팽년·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하위지(河緯地) 등 6인은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대로 ‘사육신’에 선정되었다.

『어정배식록』은 정조가 내각과 홍문관에 명령해 『세조실록(世祖實錄)』을 비롯한 국내의 공사 문적을 널리 고증해 신중히 결정한 국가적인 의전(儀典)이다.

이 때 김문기에게는 앞서 1453년 계유옥사 때 사절(死節)한 이조판서 민신과 병조판서 조극관과 같은 판서급의 중신이라는 이유로 '삼중신'이란 칭호를 내린 것이었다.

김문기의 사실을 기록한 『백촌유사(白村遺事)』 3책이 전하며,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향사되었다.

1977년 7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사육신 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의 가묘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이 문제를 놓고 일부 학자들 사이에 찬반 양론이 벌어져 신문 지상에 그들의 논설이 게재되기도 하였다.>>>>


1977<국사편찬위원회>에서 대대적으로 사육신에 대해 "사육신은 기존에 알려진 '유응부'가 아닌 '김문기'선생이다"라는 사실을 발표했다.


"학자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이것은 굉장한 사실이다.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리고 또 믿고 있는 역사란 것이 얼마나 진실과는 먼 이야기인지는 지금부터 쓰는 사육신에 관한 일을 보면 잘 알수 있다.


사육신"은 세조가 자신의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 이를 잇을 수 없는 일이라 여기며 그에 반대하다가 세조에 의해 극심한 고문을 받다 참형을 당한 사람들 중 고위직으로서 가장 주도적인 입장이었던 여섯사람을 가르킨다.


런데 이 사육신을 사람들은 조선시대 중반에서 부터 현재까지"남효온" 선생이 지은 <육신전>에 의거하여 "하위지, 박팽년, 이개, 성삼문, 유성원, 유응부,"로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만이 진짜 역사라고 믿었었다.


현 한국사의 최고 대가 이자 기둥인 "이병도"박사까지 처음에는 사육신이 유응부가 맞다고 했었으니 "남효온"선생의 <육신전>은 그 자체로 몇 백년에 걸쳐서 거짓없는 역사책으로 믿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전, 정확히는 28년전, 학자들의 자존심을 걸고 진짜 사육신은 "유응부"가 아님 "김문기" 선생임이 밝혀졌다.


그 당시 세조에 의해 처형당하던 당시부터 사육신이란 말은 있었고 그 사육신이란 말은 세조에게 반대한 수 많은 사람들 중 직책이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던 여섯 사람을 가르킨 말이었다.


하지만 "유응부" 선생은 그 당시 벼슬의 위치로 봤을때 세조에게 반대하다 참형을 당한것은 사실이겠으나 사육신에 들 만큼 높은 벼슬이 아니었다.


그에 비해 김문기 선생은 삼군을 통솔하는 다시 말해 조선의 모든 군대를 움직일수 있는 군의 최고위 벼슬이었다.


거기다 그 세조 사건당시 "남효온"의 나이는 고작 3세에 불과했는데 훗날 성인이 된 그가 어떻게 똑바른 눈으로 그 당시를 기술할 수 있겠으며 육신전을 쓰며 김문기 선생을 빼는 실수까지 더함으로써 희대의 충신을 역사의 뒷면으로 묻어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한가지 더 의심되는 것은 남효온은 육신전을 쓰기 바로 전까지만 해도 세조의 왕위 계승을 도와준 한명회등과 같은 인물들과 어울리고 그들과 같은 말을 하며 살았는데 어느 순간 육신전을 쓰고 생육신으로 불리고 충신이 된 일이다.


거기에 유응부와 남효온과는 먼 친척관계이어서 육신전에 김문기 선생을 뺸 것이 실수가 아닌 고의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마져 든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성종임금이 육신전을 보고 "무슨 이런 헤괴한 거짓으로 일관된 책이 있느냐"며 그 책에서 "유응부"가 아닌 "김문기" 선생임을 지적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어째서 그러한 <육신전>이 현대까지 사람들이 굳게 믿고 믿은 역사가 됬는지는 정말 모를 일이다.더 어이 없는 것은 고문당시 불에 새빨갛게 달군 쇠꼬챙이를 배에 쑤시자 성삼문이 "불이 식은 것 같은데 다시 달구어 오시오" 라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는 등등등의 이야기가 있는데 이 모든 말을 김문기 선생이 혼자서 했다는 것이다. 펌>